베트남으로의 여행 | ②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

최장집
2019-05-30
조회수 1396

현대 베트남 건국의 역사는 곧 호찌민의 전 생애와 함께 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넓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제3세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 가운데 호찌민 말고는 분명 없을 것이다. 그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종류의 하급 노동일과 직업을 가졌고 경험했다는 사실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최장집의 베트남으로의 여행 ②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

글쓴이ㅣ최장집 정치발전소 이사장


1.

하노이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그렇듯 우리 일행도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바딘 광장부터 가 보기로 했다. 호찌민 기념관과 묘소, 그의 생가가 베트남 공산당 본부, 국회 건물과 함께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우리가 그곳에 간 날은 마침 음력으로 3월 10일,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국조일(國祖日)로 우리나라의 개천절과 같은 날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아직도 국경일은 음력으로 기념한다고 했다. 바딘 광장 주변은 지방에서 온 관광버스와 자동차, 그 유명한 오토바이 대열로 가득 차 있었고, 보도에는 광장으로 들어가려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명절을 맞아 전국에서 모여든 것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만들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우리 일행을 위해 시간을 내어 준 국제노동기구(ILO) 이창휘 지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 줄 끝에 서서 하루 온종일 기다렸을지 모른다. 역시 현대 베트남 건국의 지도자 호찌민을 기리는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광장 주변에 모여든 인파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호찌민 박물관의 전시장에서, 20대에 독립 투쟁에 뛰어든 이래 1969년 베트남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7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호찌민의 생애에 대한 기록들과 그가 남긴 많은 글과 유물,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현대 베트남 건국의 역사는 곧 호찌민의 전 생애와 함께 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설명> 호찌민(1946). 출처_위키미디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보여 주는 자료들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안내했던 이창휘 국제노동기구(ILO) 지부장이 호찌민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영웅 보구엔지압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아래 사진 참조) 정치권력의 위계상 호찌민은 당시 베트남 노동당 의장이자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그리고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위를 갖는 최고 통치자이고, 지압 장군은 그의 휘하에 있는 군사령관이다. 흰색 윗도리에 허름한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은 호찌민이 흰색 양복 정장에 넥타이를 맨 지압 장군과 나란히 서 있다. 사진 속의 호찌민은 위대한 장군을 맞이하러 나온 이름 없는 촌로처럼 보인다. 당의 의장이자 대통령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체제와 상관없이 과연 전 세계 어느 지도자가 그런 모습으로 자기 휘하의 군 장군과 사진을 찍을 것인가? 북한의 전・현 지도자들이 군사훈련이나 건설 현장을 시찰할 때, 혹은 공식 행사 때 주요 인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뭔가를 심각한 자세로 지시하거나, 지도자를 상징하는 복장으로 중앙에 위엄 있게 서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호찌민은 권력 위계를 보여 주어야 하는 의전적 행위 같은 것에 괘념치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열람한 뒤, 박물관 중앙 입구에 세워져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호찌민 좌상 앞에 이르렀을 때 이창휘 소장은 우리 일행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설명을 요약이라도 하듯, 의미심장한 어조로 호찌민의 특징을 한마디로 ‘레닌과 간디를 합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 역시 공감하는 바 컸다. 그러나 그 말은 그가 내게 던진, 풀어야 할 큰 질문처럼 들렸다.


<사진 설명> 호찌민(우)과 보구엔지압(좌). 출처_위키미디어


2.

사실 나는 지금까지 호찌민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 즉 그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을 이끌었고,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라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호찌민의 생애를 보여 주는 많은 사진과 문서, 자료들을 훑어보며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만나게 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조국의 독립 투쟁을 이끌면서 세계의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는데 어떤 곳에서는 한동안 머물며 자신의 지적 자원과 삶의 경험을 넓혔다. 그 시기에 그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종류의 하급 노동일과 직업을 가졌고 경험했다는 사실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넓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제3세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 가운데 호찌민 말고는 분명 없을 것이다. 그의 나이 21세 때, 6천 톤급 정도 되는 프랑스 증기선에 보조 요리사로 승선하여 마르세유, 르아브르, 됭케르크를 여행했던 것이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가 다시 마르세유로 되돌아왔던 것은, 그곳 프랑스 식민지 행정 학교에 입학해 식민지 문제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입학이 거부되자 다시 배를 타고 하급 노동일을 하면서 세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경험을 쌓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그는 넓은 세계,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1912년부터 1913년 사이에 빵 굽는 일과 호텔 일을 하면서 뉴욕과 보스턴에 머물렀다는 것은 예상 밖이다. 더욱이 뉴욕의 할렘에서는 흑인 인권 운동에도 참여했다고 한다.1) 이 시기 그가 여행했던 나라와 도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알제리・튀니지・콩고 등 주로 프랑스령 나라들을 두루 방문했고,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다시 영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독일・이탈리아・벨기에 등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였고, 런던・베를린・브뤼셀 등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체류했다. 이들 도시에 머물면서 빵 굽는 일에서부터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호텔 웨이터, 식당의 화부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초기 경험의 시간들은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전체의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준비 단계였음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프랑스 공산당 당원으로서 또는 코민테른의 에이전트로서, 그리고 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도차이나에 인접한 중국과 태국 같은 아시아 지역으로 점점 활동의 중심 무대가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상하이, 홍콩, 광저우를 중심으로 또는 광둥 성, 윈난 성 일대의 여러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베트남을 넘나들면서 그는 인도차이나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뜻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산당을 조직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베트남 공산당 조직을 위해 모스크바를 왕래할 때, 프랑스・영국의 관헌이나 중국 국민당 관헌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해로로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다시 기차로 모스크바에 도착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3.

이처럼 세계가 좁다 싶을 정도로 넓은 활동 무대와 다양한 노동의 경험은 그가 베트남만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식견을 갖도록 했고, 그가 주도했던 베트남 독립운동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세계를 활동 무대로 한 그의 행적과, 남다른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이론가・문필가로서의 성향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초기 교육과 지적 자질은 부계, 모계 모두 한문학의 조예가 깊었던 가정 배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학자 출신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부터 아버지에게 배워 한문을 독해했고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고위 관직을 가진 아버지가 하노이 남쪽 고향 응에안 현에서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로 전직함에 따라, 호찌민은 현대적 식민 통치를 위한 고급 관료를 양성하는 그곳 명문 대학(Quoc Hoc)에 입학해 근대적인 행정학과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다(Goscha 2016, 137). 뒷날 호찌민 ‘키드’(kids)가 된 팜반동, 보구엔지압, 그리고 베트남전쟁 당시 그의 적이었던 남베트남 공화국 총통 고딘디엠이 이 학교 동창이었다. 호찌민의 외국어 실력도 특기할 만한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태국어를 포함해 중국어 방언까지 알았다. 영어의 여러 방언을 알았는가 하면, 독일어・스페인어・러시아어도 구사했다. 그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보기 드물게 여러 나라의 말을 쓰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30년 이상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얻은 결과물이었다.


<사진 설명> 호찌민이 베르사유 회의에서 발표한 “안남(베트남) 인민의 요구들”(Revendications du peuple annamite). 문서 마지막에 ‘베트남 애국자 그룹’(le Groupe des Patriotes Annamites)의 대표자로 표기된 구엔아이콕(NGUYEN AI QUAC)은 ‘애국자 구엔’이라는 뜻으로 호찌민의 가명이다. 
출처_www.indomemoires.hypotheses.org


호찌민이 처음 프랑스 정치의 공론장에서 일약 유명해지게 된 것은 1919년 6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를 중심 의제로 삼았던 베르사유 회의에서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당 당원이었던 그는 두 명의 동지들과 함께 베트남 대표로 참가해, (프랑스어로 작성한) 피지배 식민 통치하 베트남인들의 자주적 결정과 시민권 요구를 담은 “안남(베트남) 인민의 요구들”(Revendications du peuple annamite)을 발표했는데(Goscha 2016, 139), 이 사건이 현지 언론에 비중 있게 조명됐다. 호찌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핵심 인물 김규식・황기환・조소앙 등과 교류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가 제국주의자들은 절대로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소련 공산주의와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프랑스 사회당을 탈당하고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나, 재프랑스 베트남인 애국자단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한 것도 모두 이 때이다.


<사진 설명> 1919년~1920년 무렵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호찌민(가운데). 출처_https://imperialglobalexeter.com.


호찌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실현되지 않은 하나의 ‘윌슨적 계기’(Wilsonian moment)였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2)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 연설에서 제시한 유명한 ‘약소국의 민족자결주의’와, 국가 간 군비 감축을 통한 ‘정당하고 안정적인 평화’를 강조한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의 원리는 레닌까지도 이를 높이 평가했으며, 종전 이후 베르사유 회의의 기본 정신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정신에 따라 호찌민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그는 공산당을 선택하지 않고 친미국적이고 덜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으리라는 해석이다. 젊은 시절 호찌민이 미국의 독립선언과 헌법,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인 인권선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해석이 아주 가정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1921년 호찌민은, 프랑스・독일・영국의 식민지정책의 부당성과 프랑스의 베트남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 인민 연맹’이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만든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의 편집・발행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 밖에도 그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 식민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간행된 여러 신문들의 편집장 또는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호찌민이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2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5차 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던 무렵 레닌이 사망했다. 레닌을 생전에 만나지 못했던 호찌민의 조사(弔詞)가 『프라우다』 지에 실렸는데,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3)


독립운동을 하면서 그는 수많은 글을 썼는데, 그가 사용했던 가명 또는 필명이 무려 2백 개에 달했다. 이는 그가 독립운동의 조직자로서만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이자 이론가,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여러 언어에 능통한 비범한 자질과 능력을 두루 겸비한 뛰어난 독립 운동가였음을 말해 준다. 뒷날 당과 국가의 수반이 돼 소련과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스탈린,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 특히 주요 의제를 논의할 때 통역자 없이 직접 정상들과 대화했다.4) 호찌민 박물관에서 구입한 호찌민 전기를 보면 그가 끊임없이 글을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의 수반으로서, 심지어 전쟁 중에도 그가 좋아했던 어린이, 학생들을 만날 때면 그들에게 교훈적인 말을 전해 주기 위해 직접 원고를 썼다. 그는 1965년부터 1969년에 사망할 때까지 쓴 글을 책 『유언』으로 남겼다. 원고를 쓰는 것은 물론,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도 스스로 했다.5)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현직에 있는 정치 지도자가 직접 글을 썼던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미국을 예로 본다면 제퍼슨・매디슨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링컨, 최근 년에는 오바마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4.

박물관을 나온 뒤에도 이창휘 박사가 호찌민을 ‘레닌과 간디를 합친 인물’이라고 특징지었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그를 레닌에 비유할 수 있을까? 레닌과 닮은 그의 결단적 자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대해, 그 뒤를 이어 미국과의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쟁 없이는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신념을 관철시킬 때,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또는 전후 1945년과 1947년 사이에 베트남 공산당 내 트로츠키파들을 숙청하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친일파・친프랑스파를 숙청하면서 토지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레닌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 그는 지주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구왕당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기도 했다.6) 그렇다면 호찌민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간디적인 면은 어떤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보구엔지압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모습부터가 간디와 무척 닮았다. 그의 간디적 모습은, 바딘 광장 경내에서 호찌민 박물관과 불과 2~3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호찌민 묘와 호찌민 생가에서 확인하게 된다. 1969년 사망할 때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 세 항아리에 넣어, 북부의 통킹 만 앞바다, 중부 앞바다, 남부 앞바다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장대한 호찌민 묘를 건설한 것은 베트남 정치 지도부였으므로, 없어야 할 묘가 있는 셈이다.) 호찌민 생가 역시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평범한 베트남 보통 사람들의 가옥에 불과했다.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결혼도 하지 않고 사적으로 재산을 축재하지 않았던 그가 유산으로 남긴 것은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고 한다.7) 인자하고 서민적이고 자혜롭고 대중적이어서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 ‘호찌민 아저씨’로 불렸던 그는 분명 간디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호찌민의 레닌적・간디적 면모란 아주 다르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가명 2백여 개 가운데 그가 마지막까지 즐겨 사용했던 것은 구엔아이콕, 즉 ‘애국자 구엔’이었다. 아이콕은 애국(愛國)이라는 말이다. 애국심, 민족 공동체와 민족애를 지칭하는 이 말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독립 투쟁을 통한 베트남의 자주독립과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베트남에 대한 나라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치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냉철한 이성으로부터 추론되고 설계된, 과학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보편주의를 구현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 이론과 세계관은 그것이 보편주의를 전제로 하는 한 정치 현실에서 국제주의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냉전 시기 미국과 구소련이 세계적 차원에서 각각 대립하는 진영을 이끌었던 이념 내지 사상의 체계는 공통적으로 국제주의를 본질로 하고, 또 그렇게 표현된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와 ‘국제 공산주의’, 그 행동 조직체로서의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준말)이라는 말은 이성 중심의 서구 사상이 만들어 낸 쌍생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레닌주의는 서구 산업사회에서의 자본-노동 간 계급 갈등에 기초한 혁명 사상이고 정치적 실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베트남・한국과 같은, 농업 생산과 농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독립 투쟁이나 근대화가 기본적으로 농업 혁명적 성격을 내포한다고 할 때, 서구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혁명 이론과는 어떻게 상응할 수 있는가? 이 점에서 정치사회학자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이 말하는 ‘도덕 경제’ 이론은 자본주의사회의 노동과 자본 간 계급투쟁에 입각한 레닌주의의 국제주의적 틀과 이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8) 또한 정치적으로는 서구 및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 내지는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아시아 나라들에게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는 무엇인가. 레닌주의라는 보편주의 혁명 사상과, 서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 아시아 국가의 조건은 서구적인 것과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커다란 긴장과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세계주의적 사상은 냉철하고 이성 중심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 국가의 식민 지배하에 있는 아시아 나라의 백성들이, 계급 지배의 소멸을 지향하는 보편주의적 이념을 신봉하고, 그 이론에 복무하면서 마르크스가 말하듯 “국가와 함께 사멸”할 수는 없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한국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범아시아적 공동체를 모토로 삼았던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식민지 한국민들이 그런 작위적인 초국적 공동체에 스스로를 일체화시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식민 통치하의 한 아시아 국가로서는 세계주의와 보편적 이성의 실현에 열정을 쏟아 붓는 것보다, 목전에 놓인 자신의 현실, 즉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만큼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 이 과정에서는 역사적 공동체의 회복, 국가와 정치 지도자가 갖는 민중과의 일체성, 국가와 자기 공동체를 사랑하는 애국주의에 대한 열정을 불러오는 특수한 가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스미스 2012, 423-446).


이런 문제의식을 생각한다면 호찌민은 레닌주의적 보편주의와, 역사적 공동체를 기초로 한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를 균형적으로 병행시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의 본질을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와 민족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우선시하고 중심에 두는 보편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회경제적 내용은, 베트남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들의 삶의 조건의 향상, 그에 기초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호찌민이 레닌주의에 매몰되기 어려운 요소 내지 사상적 자원은 베트남의 역사적 전통, 공동체적이면서도 다원주의적인 문화적 유산과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호찌민은 청년 시절 프랑스로 떠나기 전 ‘국학’(國學, quoc hoc)에 심취했다고 한다.9) 베트남의 국학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랐던 말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幕府) 말기 미토 번(藩)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일본의 국학, 즉 토착 사상(土着思想, nativism)이다(Najita 1974, 51-59). 나는 베트남 국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일본 국학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분명 유교라는 보편 사상에서 파생돼 나온, 토착 문화를 중시하는 전통 사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시기 근대화 과정에서 보편적인 외래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는 데 반대해 토착적 가치와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사상이 발전한 바 있다. 베트남에 국학이 있었다는 것은 전통적 가치를 숭상하는 학문 내지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고, 일률적 근대화를 거부하는 어떤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종교적・문화적 양태가 베트남에서 또는 호찌민의 사상 체계에서 보편주의적인 레닌주의 혁명 사상과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호찌민이 서구 사상과 레닌주의를 접하면서 이런 베트남 전통 사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사상은 베트남의 혁명 과정과 호찌민의 사상 체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바딘 광장과 인접해 있는 레닌 공원에는 러시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도 유일하거나 아주 희귀한 것임이 분명한 레닌 동상이 서있다. 하노이의 구시가지를 둘러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베트남의 종교적・사상적 전통과 관련된 특징이다. 베트남은 실로 다원적 문화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레닌 동상과 유교의 큰 사당(문묘, 文廟)이 잘 유지되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서로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만큼 중국 문화의 전통이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더불어 불교 사원 또한 그에 못지않게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도가 사상을 숭상하는 사원들도 시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드물게 도가 전통이 강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식민 통치의 대표적인 유산이기도 한 가톨릭 전통도 많이 남아 있다. 한 종교, 한 정통 사상이 지배해 언제나 정통 사상을 찾고 교조적 요소가 강한 한국 문화나 전통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종교적 다원주의가 이렇게 크다면, 베트남 사회는 분명 사상적 다원주의도 강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몽테스키외와 토크빌은 풍습, 문화, 인민들의 어떤 특징적인 행동 양식(그들이 moeurs라고 말하는 것)을 한 사회의 법과 정치 행태, 제도를 운영하고 실천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중심 요소로 이해했다. 호찌민이 애국이라는 말을 사랑할 때, 그것은 베트남인들의 문화와 행동의 코드에 그 자신이 깊이 침윤되는 것을 좋아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베트남의 정치와 사회를 움직이는 풍습이랄까, 문화는 이렇듯 사상적・문화적 다원주의를 통해 표출되고, 베트남인들의 행동 양식 및 개인의 태도와 연결되는 감성의 형태일 것이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되는 호찌민의 이론 체계나 행동 양식이, 냉철한 이성이 관철되는 일원주의적 사회 구성과 친화성을 갖는 레닌적 요소와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5.

그렇다면 호찌민은 얼마나 간디를 닮았는가. 호찌민의 촌로 같은 소박함과 친근미, 깊은 종교적 수련을 내면화한 듯한 종교적 카리스마의 분위기, 그의 겸허함, 관용과 자혜로움을 동반하는 포용적 이미지는 가히 간디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간디와 그의 유사함은 행위와 태도, 모습에서 느껴지는 특징과 관련된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두 사람은 호찌민과 레닌 간의 차이 못지않게 근본적으로 다르다. 간디는 외양에서나 행위에 있어 종교적 지도자에 비유될 수 있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도덕적 지도자이다. 그가 영국 식민 통치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정치 지도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도의 독립운동은 간디가 주도한 정신적・도덕적 영역의 역할과 네루로 대표되는 대안 정부로서의 국민의회가 정치 영역에서 수행했던 역할은 뚜렷하게 분할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찌민은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폭력이 지배-피지배 관계를 규정하는 식민 통치에 저항해, 긴 전쟁을 포함하는 독립 투쟁을 가장 일선에서 평생 동안 조직하고 이끌어 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정신적・도덕적・이론적 지도자였다. 독립 투쟁에서 두 영역을 하나의 리더십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 점은 간디와 호찌민의 결정적인 차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사보나롤라를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라고 말했다. 호찌민은 정신적・도덕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조직체를 직접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외교와 전쟁을 위한 전략을 만드는가 하면,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무장한 예언자’인 것이다. 그가 드디어 30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기 위해 1941년 귀국했다 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더불어 드골이 승전 장군으로 프랑스 노르망디 바이유에 입성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호찌민은 귀국했다가도 외국으로 다시 망명해야 했고,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독립 전쟁을 지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인도차이나에 상륙한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과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일본이 패퇴한 뒤에는 다시 프랑스의 비시 정부와, 종전 후에는 제4공화국이 이끄는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또한 1954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프랑스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에는, 냉전의 절정기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과의 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50년대 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호찌민은 자신이 육성한 후배 세대의 지도자들, 특히 레두안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전쟁을 최 일선에서 지휘하는 사령탑으로서의 짐을 벗었다(Westad 2017, 316).


이처럼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프랑스의 비시정부, 전후에는 4공화국 정부와 싸웠다. 또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도 싸웠고, 이어서 미국과 싸웠다. 호찌민은 아시아 제3세계 독립운동을 이끈 사상가이자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다음 세대 청년들을 조직하고 훈련하고 이끌었던 정치 지도자이자 혁명가였으며,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베트남이라는 현대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을 이룩한, 문자 그대로 ‘국부’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식민지 해방 투쟁에서 최고 사령탑으로 독립 전쟁을 지휘해, 종국에는 승전을 이끌었던 군사 전략가이자 지휘관이었다. 이런 점에서 호찌민은 간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지도자인 것이다.


6.

나는 이제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건국의 지도자로서 그의 특징이랄까, 그것을 드러내는 행적과 아울러 그것이 남긴 유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먼저 그의 정치적인 행적, 혹은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상대하는 방식과 적대 관계를 풀어 나가는 방식에서 보이는 특별함을 들 수 있다. 그의 타협적 성향이랄까, 태도는 매우 특징적이다. 이는 그의 사상이 갖는 유연성 내지 포용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와 권력을 다루는 데 있어 본질적인 한 측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현실주의적 태도와도 관련이 깊다. 그는 인물이든 국가든 과거의 적에 대해 지극히 유화적이고 타협적이고 포용적이다. 호찌민은 전쟁의 최고 지휘관이자 군사 전략가로서, 전쟁은 모든 협상과 타협의 시도가 실패한 이후, 최후에 선택되는 정치적 폭력임을 실증해 보여 준다. 1930년대 말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임을 예상하고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교섭을 시도해 후일 베트남 독립을 약속받았는가 하면, 1944년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미국 첩보기관(OSS)과 협력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드골 장군이 귀국해 집권하고 나서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전쟁을 선택하기보다 북쪽의 중국 국민당군을 다시 퇴각시킨 뒤, 독립 승인을 목표로 프랑스와의 협약을 끝까지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전쟁에 돌입했다. 베트남전쟁 동안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끝까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균형 외교의 결과였다. 미국은 제네바회의에서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국가의 제안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은 17도선 이남에 남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 베트남이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선거도 승인하지 않으면서 선거를 연장시킨 바 있다. 그러나 호찌민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못했을 때도, 끝까지 반응하지 않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되풀이해 청원서를 보냈다.


이런 사례들은 호찌민의 외교술과 전략을 통해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대의를 향한 열정과 자긍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트남 하노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 한국 언론사의 통신원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베트콩 게릴라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사례들을 파고들어 탐사 보도를 했을 때, 베트남 정부에서 여러 차례 추방 경고를 했다고 한다. 자신들은 그런 탐사를 원치 않고, 그것은 전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0) 그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지압 장군이 서거하기 바로 직전 하노이의 프랑스 대사관은 지극히 의례적으로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그에게 초대장을 발송했다. 예상과 달리 그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대사관 행사에 참석했다. 기념식 참석자들은 모두 “가자, 조국의 아들들아, 영광의 날이 도래했다. ……”로 시작되는 유명한 프랑스 애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그때 디엔비엔푸 전투의 영웅 지압은 어떻게 했을까. 모두들 1절은 잘 부르지만, 4절까지 부르는 사람은 분명 흔치 않았을 것이다. 평소 나폴레옹을 존경했다던 지압 장군은 프랑스 대사도 다른 프랑스인 참석자들도 부르지 못하는 프랑스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막힘없이 불러 모두를 놀라게 했다.11) 이런 일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오다이 황제는 구 베트남 왕국의 마지막 국왕으로 1950년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의 공화국 국가원수를 지냈고, 구엔 카오 키는 베트남전쟁 당시 총리를 지냈던 사람이다. 전쟁이 끝나고 통일을 완성한 이후 북베트남 공산당 정부는 이들을 국빈으로 초대하기도 했다.12) 물론 이런 사례들은 호찌민 생존 시기에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압 장군은 호찌민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고, 통일된 베트남 지도자들이나 정부의 태도는 호찌민의 철학과 태도, 리더십과 통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측량하기 어려운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행위가 가능한 것은, 약소국의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향한 열정과 그것이 완성됐을 때 그들이 지니는 민족적 자긍심의 발현이라고 생각된다. 협상과 타협을 포함하는 모든 평화적 수단이 효과를 갖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전쟁은 비로소 도덕적 의미를 가지며, 그럴 때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다. 전쟁은 적에 대한 증오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민족의 자주적 독립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차선책이지만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목표가 실현됐을 때 과거의 적의와 적대 관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립과 적의를 불러왔던 요인들이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변했기 때문이다. 호찌민의 사상과 태도에 있어 과거 적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평화 지향적이고 타협적이며 화해적이다. 특정 역사적 시점에서 피아(彼我)의 구분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적대적 관계를 의미했다 하더라도, 이는 역사적 사실로 남을 뿐이다. 사실이 변했기 때문에 생각도 변해야 하는 것이다.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목표가 실현된 이후, 또는 그 과정에서 화해할 수 없는 어떤 적대적인 정치적 관계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원(舊怨)이 지속돼야 할 이유는 없다. 과거의 적과 평화공존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와 미래의 관계는 새로운 호혜 협력 관계일 수도 있고, 동맹 관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7. 

전쟁과 평화의 문제, 갈등적인 정책, 권력을 다루는 방식, 리더십...... 이런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정치 행위의 특징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온건파와 강경파 혹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의 정치적 행위와 태도에 드러나는 이미지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의 궤적에서 뚜렷하게 타협적이고 포용적인 온건파로서의 그를 발견하게 된다. 대의를 추구하는 강한 의지와 열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원칙이나 대의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으로서 길은 여러 개가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실에서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고,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데 있어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인식과 태도가 없다면 갖기 어려운 특성이다. 다원주의는 타협적인 것, 유연함, 점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런 태도는 민주주의의 에토스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지면서 서로 접맥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모든 일원주의적인 것에 대비되며, 본질적으로 자주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어 낸다. 예컨대 이념적 차원에서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정치 현실과 권력의 성격이라는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 그 독재의 정점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만들어 내기 쉽다는 점에서 그 둘은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레닌주의가 현실의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따라 스탈린주의로 구현될 가능성은 높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호찌민의 리더십이 남긴 유산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베트남전쟁 시기 호찌민이 온건파였다면, 레두안은 강경파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말하는 것은, 호찌민의 정치적 유산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그것은 호찌민이 베트남공산당 권력 구조에 있어 권력의 분산을 제도화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발전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호찌민은 생전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그 자신이 끝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레두안, 트룽친, 팜반동 같은 다음 세대 지도자들, 이른바 ‘호찌민 키드들’에게 서서히 권력을 이양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집단지도체제적 구조를 발전시켰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집단지도체제가 제도화된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지만 호찌민이 선도해 기초를 만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만년에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유능한 후배 세대들에게 권력을 분점시켜 나갔다. 그의 사후 이를 바탕으로 레두안 시기 국가평의회 의장인 혁명 원로 트롱친, 각료 평의회 의장 팜반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의 발전으로 구체화됐다. 권력이 일인으로 집중되지 않고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분점 되어 권력 구조가 개방적일 수 있고, 다른 정책들이 경쟁할 수 있으며 국가 운영이 유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공산당의 국가 운영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면서도 안정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구조는 리더십의 순조로운 세대교체와 유능한 지도부의 형성을 가져온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의 자민당 일당 지배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은 일당이로되 여러 당파로 구성돼 있어, 다원적 권력 중심을 허용하고 정책을 둘러싼 경쟁을 가능하게 해 당의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이제 이야기가 결론에 이르렀다. 호찌민은 어떤 정치 지도자인가? 레닌과 간디를 합친, 위대한 정치 지도자인가? 내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호찌민은 그보다 먼저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에 비유되거나 그런 인물들을 합친 어떤 정치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큰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 정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호찌민의 베트남은 반식민지하의 아시아적 농업 사회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근대화의 이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국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규모 면에서 마오쩌뚱의 중국과는 배경이 크게 다르다. 호찌민의 리더십은 식민 통치하의, 아시아적 농업 생산 체제에 기초한 낙후된 제3세계 약소국이라는 조건에서 형성되고 발현된 것이다. 평생을 통해 일관되고 흔들림 없이 대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의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정신적・지적 힘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 리더십과 인품으로, 제국주의 시기 탈식민화 투쟁으로부터 냉전 시기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라는 도전을 뚫고 현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라는 데 이견이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그 자신이 하나의 이상형인 것이다. 우리는 그의 행위와 여정,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론적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루소가 말하고 있는 건국의 지도자 모델이 왜 중요한가를 그의 행적과 유산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된다.13) 그들이 강조하는, 건국의 지도자가 갖는 중요성은, 냉전을 포함하는 우리의 동시대 현대적 국민 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호찌민의 사례를 통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주석

1) “호찌민,” <위키백과>.

2) “Hochimin,” Wikipedia.

3) “호찌민,” <위키백과>.

4) “Hochimin,” Wikipedia.

5) Ho Chi Minh Museum, Chu Duc Tinh ed. Ho Chi Minh Biography (The Gioi Publishers, Vietnam, 2016), pp.190-192.

6) “호찌민,” <위키백과>.

7) “호찌민,” <위키백과>.

8) ## James C. Scott,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 Rebellion and Subsistence in South East Asia (Yale University Press, 1976). 이 책은 식민 지배 시기 통킹 만 일대의 베트남 농민들을 경험적 사례로 연구한 것이며, 농민 경제에 대한 고전으로 높이 평가된다.

9) “호찌민,” <위키백과>.

10) ## 이 일화는 필자의 죽마고우인 정준성 씨가 내게 전해 준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이래 파리에 사는 교민으로, 베트남과 알제리를 포함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필자가 언급한 사례는 과거 『한겨레』,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던 한 통신원의 사례로, 당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1) 이 일화는 지압 장군이 2013년 10월 4일 사망했을 때 장 프랑수아 지로(Jean Francois Giraud) 주베트남 프랑스 대사가 프랑스 F1 텔레비전에 출연해 말했던 것이다. 그때 프랑스의 많은 시청자들은 지압 장군에 대해 놀라움과 존경심을 표했다고 한다. 이 사례 역시 정준성 씨의 전언에 의한 것이다.

12) 역시 정준성 씨의 전언에 따르면 베트남 정부의 초청을 받았던 바오다이 전 황제는, 그 역시 참석하고 싶었지만,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1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로마사 강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 정치철학의 여러 중심 저작들은 한 나라의 건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논하고 있다. 이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 로마 공화주의 전통의 저작들 사이에서 널리 발견된다.


참고 문헌

● Goscha, Christopher. 2016. Vietnam: A New History. Basic Books, New York.

● Ho Chi Minh Museum, Chu Duc Tinh ed. 2016. Ho Chi Minh Biography (The Gioi Publishers, Vietnam, 2016), pp.190-192.

● Najita, Tetsuo. 1974. Japan: Intellectual Foundations of Modern Japanese Politic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Scott, James C. 1976.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 Rebellion and Subsistence in South East Asia. Yale University Press.

● Westad, Odd Arne. 2017. The Cold War: A World History. Basic Books.

● 스미스, 스티븐 지음, 오은숙 옮김. 2012. “애국주의를 옹호하며.” 『정치철학』. 문학동네.


최장집 ㅣ정치발전소 이사장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이사장이자 고려대 명예교수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과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로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1997),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10), 『민중에서 시민으로』(2009),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2013), 양손잡이 민주주의』(공저,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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